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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동반 여행

바닷가의 낯선 남자

어린 시절 몽돌 해변에 갔던 사진을 얼마전 발견했다. 갓 아기 티를 벗은 나와 동생이 수영복 팬티만 입고, 노란 해바라기 모자를 쓰고, 둥글둥글한 돌멩이가 빼곡하게 널린 해변에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이다.

그 사진은 나를 어린 시절의 시공간 속으로 곧바로 끌어당겼다. 거의 내 생애 최초의 기억이랄 수 있는 기묘한 추억은 그런 바닷가에서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 가족이 바닷가에 놀러가면 우리는 모래사장의 방갈로에서 묵었다. 나랑 동생은 방갈로 주변을 하릴없이 아장거리며 휴가를 보냈다. 휴가철 꽤 북적대는 바닷가 사람들 틈에선 젖은 수영복에서 나는 비릿한 바닷물 냄새와, 발리볼을 하고 흘린 쿰쿰한 땀냄새가 꽤 분명히 구분되었다.

방갈로들 한쪽에는 수돗가가 있어서 식사 준비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곤 했다. 그날 나는 좀 멍한 상태로 수돗가에 줄을 선 사람들 주변을 알짱거리다가 그중 한 남자에게 이끌리듯 다가갔다. 내 키는 그 남자의 엉덩이 정도였다. 바로 눈앞에 그 남자의 손이 늘어져 있었다. 나는 또 뭔가에 홀린 듯 그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아빠.”

그러자 그 남자는 나를 내려다보며 화들짝 놀라 자기 손을 뺐다. 그리고 말했다. “야, 내가 어떻게 니 아빠니?”

나도 역시 화들짝 놀라 휙 돌아서 줄달음을 쳐 도망갔다. 수돗가에 줄 선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리는 소리와 그 남자가 펄펄 뛰며, 모르는 애라고, 자기는 총각이라고 소리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멀리까지 도망쳐 한참을 서성이다가 우리 방갈로로 돌아갔다. 엄마가 대체 어디 갔었느냐고 나무랐다. 나는 “응… 있잖아... 아까 수돗가에서…” 하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나도 아까 줄 서 있다가 봤어. 너 왜 그랬던 거니? 한참 웃었다, 야. 아빠는 방갈로에 있었는데.” 나는 엄마가 야속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했다.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상하게 그 남자한테서 아빠랑 똑같은 냄새가 났어’였다.

*이 글을 읽고: 글쓰기 모임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들을 토해놓았다. 어린 시절은 아니고 어른이 되어서, 다른 아이가 그/그녀를 부모 중 하나로 착각하고 다가와 손을 잡아 깜짝 놀랐던 경우가 여섯 명 중에 두 명이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나만의 기묘한 경험이 아니라 꽤 보편적인 일이었던 거다. 글쓰기 모임에 참가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나만의 이상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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