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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동반 여행

사촌의 시골 외갓집




내가 어렸을 때는 방학이면 ‘시골 외갓집’에 내려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뭐, 상황이야 다 달랐겠지만, 대체로 여름 내내 산과 들에서 신나게 뛰어 놀고 오두막에서 할머니의 귀염을 듬뿍 받으며 맛있는 과일을 먹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동화 같은 이미지가 전형적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시골에 사는 친척이 없었다. 친할아버지와는 같이 살았고 외할머니의 집도 서울에 있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몇번 졸랐다. “우리는 왜 시골에 친척이 없어? 나도 시골 가고 싶어.” 그러자 엄마는 우리와 가깝게 지냈던 큰엄마의 친정인 어느 시골로 우리를 보냈다. 큰엄마도 역시 여름 방학이면 나의 사촌 자매들을 외갓집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곳이 김포였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지금은 공항이 있고 신도시가 생겨난 김포가 그냥 논밭뿐이던 시절에 나는 그곳으로 몇 차례 여행 비슷한 것을 떠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봄가을 주말에 시골길로 소풍도 떠나고, 겨울에 이모를 따라 논물을 얼려 만든 스케이트장도가고...

어쨌든 나의 사촌의 외갓집은 포도를 주로 재배하는 농가였다. 대가족이었던 그 집에도 아이들이 있었고 나와 내 여동생, 나의 사촌 자매 둘, 이렇게 네 명의 서울 여자아이들은 시골 아이들과 꽤 스스럼없이 어울려 놀았다. 원래 방학마다 보던 사촌들에게 뜬금없는 낯선 여자아이 둘이 붙어왔으니 떨떠름 할 만도 했을 텐데 그곳 아줌마와 언니들은 대체로 무심하고 넉넉한 태도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 집에서 재배하던 포도도 나무에서 직접 따서 먹어보았는데, 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그 집 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포도가 맛이 없지? 술 담그는 거라서 괜찮아.”

지금 생각하면 난생 처음 시골에서 지내게 된 나는 꽤 우쭐거리며 뭔가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소나기] 같은 문제적 로맨스를 떠올렸었는지도. 그래서일까, 시골 아이들과 함께 땅따먹기 놀이를 하면서 보란 듯이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펄쩍펄쩍 뛰다가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던 순간이 선명히 기억난다. 무릎에 찌르는 듯한 아픔과 함께 그냥 거기 엎어져 있고만 싶은 쪽팔림이 밀려왔다.

잠시 엎드려 있는데 시골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헛, 어떡해...” “아프겠다....” 나는 왠지 내 옷을 걱정하는 아이는 없을까 의문이 들었던 것 같다.   

얼마전 친구가 유학을 하고 있는 외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다른 사람의 삶의 터전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다. 물론 여행지에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보며 깊은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들도 나에게, 나도 그들에게 연극적 행동을 하며 그것은 생활이라기보다 일종의 의례 같은 것이 되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현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지인의 삶속으로 어설프게 들떠서 들어갈 때는 그런 의례가 부재하면서 관계와 행동 방식을 재정립해야 하는, 혹은 다시 만들어야 하는 순간에 맞닥뜨릴 때가 있는 것 같다. 

내가 옛날에 나의 가족들과 떨어져, 시골의 남의 가족 네 집에, 사촌의 외갓집에 가서 체험하고 싶어 했던 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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