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내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동해의 소도시로 전근을 갔다. 이전에도 부모와 함께 동해의 바닷가를 놀러갔던 적이 있지만, ‘지방 도시’에는 이때 처음 가봤던 것 같다.
바다 냄새가 실린 깨끗한 바람과 시내 중심가의 나지막한 건물들, 그리고 독특한 억양으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도시. 여행과 자연을 좋아했던 나의 부모는 지방으로 전근 가서 행복해했고, 1년 동안 마치 파리로 전근 가서 남프랑스로 여행이라도 다니는 사람들처럼, 강릉 일대를 신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나랑 동생은 처음 낚시를 해보았다. 아버지의 직장 동료가 데려간 어느 호숫가에서 생각보다 많은 장치들로 이루어진 낚싯대를 손에 잡고, 위험하게 생긴 바늘과, 신기한 원리의 찌에 대해서 배웠다.
문제는 미끼였다. 깻묵으로 밑밥을 물에 뿌려준 후 낚시바늘에 지렁이를 꿰어야 했다. 아버지의 동료가 처음 몇 번은 해주었다. 이후 그는 자기 낚시에 바빠 나랑 동생 쪽으로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낚시바늘을 잡고 낚시줄을 당겼다가 픽 놓으며 멀리 물속으로 던지니, 붕어들이 순식간에 미끼를 물었다. 힘을 주어 낚싯대를 당기면 그들이 파닥거리며 딸려나오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래서 다음부터 나랑 동생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직접 비닐봉다리 속 지렁이를 손가락으로 집어 미친 듯 날뛰는 그 몸에 낚시바늘을 꽂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지금도 벌레만 보면 소리를 꾸엑 지르는 나와, 나보다 더한 겁보인 내 동생이, 마치 ‘예외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행동했다.
그곳에 사는 동안 처음 배도 타봤다. 역시나 낚싯배였다. 우리 가족 같은 관광객을 태우고 약간 먼 바다로 나가, 바닷속으로 낚싯줄을 드리우는 거였다. 바다에서 사용되는 미끼인 갯지렁이는 더욱 냄새가 심하고, 집으면 더욱 심하게 날뛰면서 손가락을 휘감았지만, 나랑 동생은 그것들 몸통을 뚝뚝 끊어서 편리한 크기로 만든 다음 능숙하게 낚시 바늘에 꽂곤 했다.
그 이후로는 낚시를 다시 한 적이 없다. 당연히 이제는 절대로 지렁이를 맨손으로 만지지도 않는다. 요즘 집에서 키우는 블루베리와 금귤 화분 안에 지렁이가 살고 있어서 가끔 밖으로 튀어나오는데, 늘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무 젓가락 같은 걸로 간신히 집어올리면서, 혼자 오도방정을 떤다.
이 글을 읽더니, 같이 글쓰기 모임을 하는 동료가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 역시 생선 손질은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집에서 기르던 어항 속의 구피가 죽자, 그 시체를 보는 것조차 무서워하면서, 아들을 시켜 처리하게 했다고 한다.
나랑 동생이 어린 시절 아무렇지 않게 지렁이와 갯지렁이를 맨손으로 잡고 몸통을 끊게 만든 ‘마법’은 사실 ‘먹고 살기’ 위한 지극히 동물적인 본능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화분 속 지렁이나 구피의 시체에 공포를 느끼는 것이 예외적인 심리적 애착 기제의 발현이었을 수도 있고 말이다.
또다른 심리학 학설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에서 이런 감정이입은 지극히 당연한 특성이지만, 인간에게는 또 생존을 위한 감정이입 차단 기능도 탑재돼 있다고 한다. 이 ‘감정이입 차단 기능’은 인간 사회에서 굉장히 빈번하고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을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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