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 아버지 회사에서는 여름마다 지방 관광지에 숙소를 정해 직원의 가족들이 차례로 가서 2박3일씩 머물다 오도록 했다. 주로 동해의, 크지만 낡은 중급 호텔이었다.
어린 나와 동생은 엄마에게 “올해 여름엔 어디 가?” 하고 물어보고 엄마가 “설악산”이라고 하면 “또!” 하면서 불만스러워했던 것 같다. 설악산 아래 호텔에 머물면서 아침마다 단체 버스를 타고 근처 동해바다로 해수욕을 하러 가는 휴가는 좀 지루했다.
그러다가 어느 해던가는 휴가지가 ‘경주’로 지정되었다고 해서 꽤 기대에 부풀었다. 그리고 엄마는 나의 사촌들도 같이 데려가겠다고 했다.
아버지에겐 아버지보다 조금 가난하게 사는 형이 있었고, 나의 엄마는 그집 큰엄마와 친하게 지냈다. 그집에는 나보다 두 살 많은 사촌언니와 한 살 아래 사촌 여동생이 있어, 우리 자매와 그들 자매도 친하게 지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나의 사촌언니와 사촌동생을 여름휴가에 데려가기로 한 건, 그들을 ‘동정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주로 여름에 시골 외갓집에 갔고 다른 여행은 안 가는 것 같긴 했지만, 경주의 중급 호텔이 무슨 대단한 여행지라고, 그들을 거기 데려가는 게 큰 혜택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예전에 나를 사촌의 외갓집에 데려가주었던 큰엄마에게 진 신세를 갚는 거였다.
그런데 어린 난, 왠지 모르게, 그 집은 우리집보다 못 사니까, 우리가 휴가를 데려가주는 은혜를 베푸는 거라고 생각해 버렸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네 식구에 여자아이 둘이 더해져, 이동이나 잠자리가 불편해졌을 때, 나는 짜증을 부리며 위세를 떨었다.
어느 날 후덥지근하고 비좁아진 차 안에서였던가, 내가 짜증을 부리다가 뭐라고 한 마디를 했다. 무슨 말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아마 현 상황에 대한 무례하고 거만한 코멘트였던 것 같다.
일순 차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고 나를 야단쳐야 했을 엄마나 아빠도 당황한 듯 침묵만 흘렀다. 그러자 사촌언니가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XX는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구나.”
그녀는 나보다 겨우 두 살이 많았을 뿐이고 우리는 이제 막 십대에 들어선 나이였다. 그 나이에 그런 침착함과 어른스러움은 어떻게 익혔을까?
이후 차 안에선 별 말이 오가지 않았고 나는 목적지로 가는 내내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그때의 그 거만한 어린이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을까, 아니 커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셈이니 어릴 때의 잘못된 생각들은 사면되는 것일까, 궁금하다. 지금은 그 사촌들과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게 된 게 그런 업보들이 쌓여서는 아닐까 궁금하다.
이 글을 썼더니 같이 글쓰기 모임을 하는 동료들이 저마다 비슷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자기 부모의 가게에 와서 일하던 사촌언니에게 느꼈던 우월감, 자기 부모가 도와주던 가난한 친척이나 친구를 보며 맛본 우쭐하는 느낌..
그런 기분을 맛보는 게 우리 자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기에 그런 고약한 우월감을 느껴야 하는 걸까, 라는 나의 질문에 대해선 자존감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답이 힘없이 제기되었으나, 그 역시 참 씁쓸한 답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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