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2학년 겨울방학 때, 나 혼자 찾아다닌 지방의 친구들 가운데는 안동 사람도 있었다. 그녀와 나는 자주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가끔씩 따로 만나 지난 이야기를 왕창 털어놓는 사이였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고향인 안동 이야기를 많이도 들었다. 하회마을로 대표되는 안동은 유서 깊은 가문들이 모여사는 전통의 고장으로 알고 있었지만, 친구와의 수다를 통해 든 인상은, 가장 향우회의 활동이 활발한 고장이 아닌가 싶었다. 그녀는 안동 향우회에서 대부분의 친구 관계를 맺고 연애도 그 안에서 했다.
그해 겨울방학, 안동에 무작정 찾아갔더니 그녀는 말로만 듣던 자기 친구들을 술집에 불러모아 소개를 시켜주었다. 좁은 안동 시내에서 몇 차를 하며 돌아다녔더니, 결국 하룻밤만에 그녀의 고향 친구는 모두 한 번씩 만나거나 길에서 우연히라도 마주쳤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에 그녀의 속을 썩이던 남자친구는 결국 안 불렀고, 우연히 마주치지도 못해서 아쉬웠다. 그녀는 대신 나에게 고등학교 때 은사를 내일 같이 찾아가자고 했다.
그녀의 고등학교 때 멘토는 미술 교사였다. 지금은 학교를 그만 두고 전업 화가가 되어,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안동 인근 산골에 작업실 겸 공동체를 만들었다. 원래 초등학교였던 폐교를 개조한 곳이라고 했다.
요즘도 가끔 산골 여행을 구석구석 다니다 보면, 오지 마을에 세워진 학교가 눈에 띈다. 아직 분교를 유지하고 있는 곳도 있지만 종교 단체나 예술가들이 인수해 개조를 하고 공동 생활 혹은 공동 작업의 장소를 쓰고 있는 곳도 보인다.
그런 곳을 직접 가본 건 처음이라 기대를 잔뜩 했다. 옛날 산골 학교 건물이란 기본적으로 운치(?)가 있는 공간이고, 더구나 미술가들이니 솜씨 좋게 꾸며놓지 않았을까 싶었다. 과연 산과 숲이 둘러싼 학교 건물에서 교실 하나하나를 작업실로 개조해 놓은 환경이 너무 좋아 보였다. 그녀의 은사님도 너무 다정하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초창기라 그런지 뭔가 어수선했고 살림도 초라해 보였으며, 무엇보다 몇 점 없는 선생님의 그림들마저 별로였다. 이래서 어떻게 전업 화가를 한다는 거지, 실망하고 있는데, 나의 눈치에 좀 당황한 선생님이, 다른 화가의 작업도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곳 공동체에서 제일 잘 그린다(!)는 분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밀레의 그림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과연 뭔가 좀 있어 보였다.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다 같이 라면을 먹으며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창 술 퍼마시며 돌아다니던 20대 초반의 나는 필름이 끊겼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담요와 침낭을 둘둘 말고 교실 마루를 뒹굴고 있었다. 나보다 멀쩡해 보이는 친구에게 간밤의 상황을 들어보니 가관이었다.
내가 밀레의 화풍을 닮은 화가 분께 “당신 그림에서 황토색을 빼면 뭐가 남느냐?”는 폭언을 했다고 한다. 그랬을 리 없다고 펄쩍 뛰어보았지만, 친구의 은사님도 빙글빙글 웃으며 정말 그랬다고 확인시켜 주었다. 띵띵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밖으로 나갔더니, 밀레 화가 분이 진지한 표정으로 제안했다. 차로 서울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나중에 나의 친구는 결국 안동 남자와 결혼을 했다. 안동의 어느 소박한 예식장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차를 몰고 굽이굽이 산길을 지나 찾아갔다. 예식장 마당에 주차를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벌컥 열었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예식장 로비에 머리가 하얀 난쟁이 할아버지들이 백명쯤 모여 있었다. 마치 기묘한 동화 속 세상에 들어온 것 같았다. 왠지 그때 그곳에는 할머니도 없고 아줌마도 없고 처녀도, 청년도 보이지 않았다. 염색도 안 한, 하얀색 짧은 머리를 하고 하얀 반팔 와이셔츠에 까만 양복 바지를 입은, 키가 조그만 할아버님들만 바글바글 눈앞에 가득 모여 있는 광경은 초현실적이었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마콘도가 여기가 아닐까도 싶었다. 나중에 결혼한 친구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그랬을 리가 있냐며, 네가 잘못 본 거 아니냐고 핀잔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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