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대학교 신입생이 되었을 때, 거의 매주 이런 저런 오리엔테이션과 엠티를 가다가, 학기가 시작하고 두어 달 후, 동기들끼리만 엠티를 가게 됐다. 학교 생활을 선배들의 지도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던 학기초,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과, 한 켠에서 자라나던 그들에 대한 거부감, 반항심 때문에 꽤 스트레스를 받았나 보다.
드디어 우리 스무살 동기들끼리만 모여서 엠티를 갔더니, 나는 그날 저녁 술을 엄청 퍼마시고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처음으로 필름이 끊어졌지만 지금도 언뜻언뜻, 그때의 내가 바닥에 엎어져 대성통곡을 하고, 한 여자애가 내 머리를 쓸어올려주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슬픈 말투로 말했다. "왜 삼단 같은 머리를 풀어내리고 우니..." 그때 내가 머리가 좀 길었다.
그 난장판 와중에 벌써 커플이 되어 슬쩍 사라지던 아이들도 기억난다. 나중에 정신이 들어 보니, 나도 한 남자애와 숙소 뒤쪽 개울가 평상에 나와 앉아 있었다. 이제 늦봄이었고, 연두색으로 한창 잎을 피워올리는 나무와 수풀 사이로 시냇물이 졸졸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훌쩍훌쩍 남은 울음을 삼키며 아침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 수면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술 먹고 지랄하는 건, 늙으나 젊으나 마찬가지겠지만, 젊을 때는 좀더 뜬금없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고 나서 몇년 후, 대학교 졸업반쯤이었던가, 다시 봄에 장흥으로 몇몇 동기들만 모여서 엠티를 갔다. 애들은 이제 술도 별로 안 마시고 더 이상 쌍쌍이 사라지지도 않고 넓은 숙소 한구석에 퍼질러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역시 놀라운 광경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난 나의 친애하는 여자 동기들이 세수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옹기종기 수돗가에 모여가 쭈그리고 앉아 세수를 하는 대신, 쿨쿨 자다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더니 이불도 젖히지 않고 주섬주섬 콤팩트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남자 동기들 옆에서도 태연한 얼굴로 눈꼽을 좀 뗀 다음 덕지덕지 스폰지를 얼굴에 두드리고 립스틱을 새로 발랐다.
기겁한 나는 “너네 세수 안 해?” 하고 소리쳤지만, 그녀들은 눈쌀을 찌푸리고 말했다. “날도 아직 추운데 찬물에 어떻게 세수를 하냐? 너도 이거나 발라.” 나는 화장을 안 하는 대신 세수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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