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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여행 모험

농활과 마의 산

옛날에 대학에 들어갔더니 2월부터 4월까지 여섯 번인가 여행, 아니 엠티를 가게 됐다. 단과대학에서 다 함께 가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개별 학과에서 가는 전체 꽈엠티, 우리 과 신입생끼리 가는 학년엠티, 그리고 새로 들어간 학회에서 가는 학회엠티, 스터디 모임에서 가는 스터디엠티, 동아리에서 가는 동아리엠티.

 

매주 계속되는 외박에 엄마는 혀를 내두르며 더 이상 엠티는 못 간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4월말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행이 있었다. 그건 바로 봄농활, 즉 ‘대학생 농촌 봉사 활동’이었다. 분명 엠티는 아니었다. 나는 빡빡 우겨서 봄농활을 기어이 갔다.

 

보통 농활은 여름에 간다. 열흘 동안 뙤약볕에서 새까맣게 그을리며 논에서 잡초(피)도 뽑고 채소 수확도 하는, 대학 생활을 통틀어 가장 장기간에 걸쳐 이뤄지는 보람찬 활동이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여름에 다른 계획이 있었다. 멋진 언니 오빠들이 그득한 ‘미술 동아리’에서 딱 그 기간 동안 여름 스케치 여행을 제주도로 간다고 했던 것이다.

 

게다가 극성 운동권들이 많던 우리 학과는 여름뿐 아니라 봄과 가을에도 농활을 가고 있었다. 주말을 끼고 수업을 일부 제끼고 가는, 4박 5일짜리 짧은 일정이었다. 열흘씩이나 농촌에 처박히기는 싫었지만 한번쯤 꼭 가보고 싶던 농활을 그때 가면 되겠다 싶었다. 여름 농활은 못 간다는 나를 벌써부터 비난하는 학과 친구들에게, 대신 봄농활과 가을농활은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내가 대학에 다녔던 90년대는 아직 좀 엄혹(?)했던 시대라, 대학 분위기는 또한 꽤 엄숙할 때가 많았다. 농활 역시 선배들이 준비도 힘들여 하고 후배들을 엄하게 교육시킨 다음 데리고 갔다. 우리가 갔던 곳은 경북 어느 산골이었는데, 여자애들은 반바지도 입지 말라고 할 정도로 보수적인 곳이었다.

 

농민들과 대학생들의 첫 대면에는 꽤 긴장감이 흘렀다. 상업적 숙박 시설이 없으니 잠은 마을회관에서 무료로 잤지만 우리 대학생들은 농민들에게 밥도 얻어먹지 않았다. 농사일 중간에 제공되는 국수나 떡 같은 약간의 새참 이외에는, 학생들이 가져간 식재료로 직접 밥을 해먹을 정도였다.

 

마을에 도착한 후 이틀 동안 우리는 농사일도 하지 못했다. 마을 청소부터 시작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도랑 청소에 투입돼서 정말 빡세게 일했던 기억이 난다. 마을 한 켠을 흘러 가는 도랑은 언제 청소했는지 온갖 오물이 흩어진 채 역한 냄새를 풍겼고, 갈퀴, 꼬챙이, 호미 등 온갖 도구를 이용해 곳곳을 파내다시피 청소를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일하고 나서 또 저녁에는 학생들끼리 활동 평가 회의와 농촌 현실 교육 등의 시간이 이어져 꾸벅꾸벅 졸다가 그대로 쓰러져 자는 식이었다.

 

그래도 셋째 날부터는 농사일에 투입돼 난생 처음 논에 들어가 봤다. 농민 분들과의 긴장감도 좀 풀려, 새참시간에 막걸리도 한 잔 얻어먹었다. 그런데 알딸딸한 상태로 논물에 들어가 피를 뽑다가 그대로 미끄러져 흙탕물에 몸을 풍덩 담그고 말았다. 덕분에 나는 씻는다는 핑계로 숙소에 돌아와 그대로 쓰러져 저녁까지 잤다.

 

그러고 나서 여름 방학, 나는 그림 동아리에서 스케치 여행을 신나게 갔다 왔다. 그 동안 우리 과 친구들은 여름 농활을 다녀왔고, 2학기가 시작되고 나서도 그때의 추억으로 떠들썩했다. 끔찍했던 벌레와의 사투, 두엄과의 전쟁, 고된 농사일, 농민들의 호된 질책, 선배들의 사상 투쟁 등, 모험담이 풍성했고 나는 소외되는 분위기였다.

 

뜨거운 여름의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후, 10월에 다시 농활 기간이 되었다. 여름농활 때 고생을 지독히 했다더니 나의 동기들은 가을농활에 참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소수의 선배들과 팀이 꾸려졌다. 어쨌든 나는 약속한 대로 따라갔다. 긴장감은 여전한 채로 많이 침울해진 분위기였다.

 

나는 그때 [마의 산]이라는 책을 가져갔다.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이 쓴, 결핵에 걸린 사람들이 요양원에 모여 한가하게 예술과 인생에 대해 논하는, 매우 길고 지루한 철학 소설이었다. 어쩌면 그 소설은 가을농활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갈피를 잃은 듯한 학생들, 지리멸렬한 일상에 지친 듯한 농민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소설을 읽었고, 쉬는 시간 짬짬이 기어코 읽고, 저녁의 기나긴 회의 동안에도 한 구석에서 그 소설을 읽었다. 다들 짜증어린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상관없었다.

 

아직도 농활과 소설을 함께 검색하면 심훈의 [상록수]가 나오는데, 정말 이제는 100년전 소설 아닌가. 다른 적당한 작품은 안 나오는 걸까? 좀 문제적 사례가 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농활에 대한 가장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손아람 장편소설 [디마이너스 D-]에서 읽었다. 농부의 애매한 성추행과 특권층 학생 부모의 개입이 빚어낸 한 편의 활극이 씁쓸하게 펼쳐진다.

 

아직도 대학생들이 농활을 가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오늘날엔 보다 힙해 보이는 조직, wwoof가 있다. “유기농가 및 친환경적인 삶을 추구하는 곳에서 하루에 반나절 일손을 돕고 숙식을 제공받는 활동”을 한단다. 가끔 소셜 미디어에서 보면 거의 킨포크처럼 멋져 보이던데, 정말 그렇게 돌아가는 건지는 모르겠다.

 

PS. 같이 글쓰기 모임을 하는 친구가 요즘에는 워홀(워킹홀리데이)를 가는 거라고 알려주었다. 태국으로 '해비타트'를 가서 2주 동안 집 짓는 봉사를 한 이야기도 들려줬다. wwoof도 국내 참가자보다는 해외참가자들에 더 신경을 쓰는 듯했으니 이제는 흐름이 그렇게 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