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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여행 모험

그림 동아리의 여름여행과 겨울여행

대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제주도에 가보았다. 지금은 일년에 몇 번씩 가게 된 제주도. 너무 많은 추억이 쌓여가서, 최초의 기억 같은 건 이제 너무 멀리 떠나보낸 것 같지만…

 

대학에 입학 하자마자 가입했던 그림 동아리에서 열흘간 제주도로 여름 스케치 여행을 간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저마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거기에 작은 스케치북 정도를 챙겨 갔던 것 같다. 아무래도 실제 그림을 그린 기억이나 사진은 없는 것 같은데... 스무명도 넘는 인원이 목포까지 밤새 완행 열차를 타고 내려가서 제주행 페리를 타는 여정이었다. 

 

야간 기차안에서 술 먹고 포커치고 노래를 부르던 대학생들의 밤샘 아수라장 중에 유일하게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풍경은, 당시 부회장 역할이었던 어느 활달한 여자선배의 행동이었다. 아침이 되자 그녀는, 자기랑 평소 친했던 남자선배에게 세면도구와 화장품이 든 가방을 들려 화장실로 갔다. 나중에 투덜투덜 진술한 남자선배에 따르면, 그녀는 끝도 없이 세안제를 쓰고 끝도 없이 로션을 발라서 아주 시중드느라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녀는 “여자들은 원래 그런 거야, 오빠!” 하고 타박을 주었다. 그녀 이외에 그런 여자는 우리 동아리에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목포에서 밤기차에서 내린 후에는 또 느리딘 느린 여객선을 타고 거의 대여섯 시간이 걸려 제주도까지 항해했다. 자동차도 많이 실은 중형 여객선은 지하(?)쪽에 비닐 장판이 깔린 넓은 선실이 마련돼 있었다. 밤샘 기차의 여파로 대부분의 아이들은 기절하듯 수면중이었지만 몇몇은 멀미로 신음하며 뒹굴거나 밖에 나가서 바닷바람이라도 쐬야겠다며 헐벗은 갑판으로 올라가 몇 개 안 되는 나무벤치에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막상 제주도에 도착해서는 곳곳을 여행 다녔겠지만... 한라산 백록담 가는 길에 펼쳐졌던 안개 혹은 구름과 고지대 초원 같은 그곳의 기기묘묘한 야생화들 말고는 기억이 전혀 안 난다. 적어도 일주일은 여기저기 돌아다녔을 텐데, 사진도 몇장 남아 있는데, 어디서 묵었는지, 어디를 갔는지, 뭘 먹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다만 무척 좋기는 했던 것 같다. 그해 겨울방학에는 강원도로 또 '스케치' 여행을 간다고 해서 냉큼 따라 갔던 걸 보면 말이다.

 

겨울여행 때는 아무래도 겨울이니까 추운 데다가 옷가지도 무겁고 힘들었을 것이다.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묵직한 스포츠백을 젊은 어깨 한 쪽으로 짊어지고 버스 정류장에 친구들과 서 있는 내가 보인다.

 

 

그러나 역시나 여름여행처럼 여정이나 관광지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 가운데, 어느날 밤의 숙소 밖 광경은 아직도 선명하다. 역시나 스무 명쯤 되는 대인원이 커다란 방 하나에서 다같이 자는 저렴한 숙소였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게임을 했는데, 술이 떨어지자 한 남자선배가 사가지고 오겠다고 일어섰다. 근데 한 여자선배가 자기가 도와주겠다면서 같이 일어서는 것이었다.

 

 

아, 또 저렇게 사라지는 건가? 한 커플 탄생하는 건가? 잠깐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난 곧 잊어버리고 게임에 열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러다가 화장실을 가려고 밖으로 나갔는데, 저쪽 건물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거였다. 가까이 가보니 아까 술사러 나갔던 선배들이었다. 

 

건물 뒤에 장작을 쌓아놓은 곳에 여자 선배가 누워 있고 그 위를 남자선배가 타고 올라 키스를 하며 옷을 헤집는 듯했다. 그리고 여자 선배는 '안돼, 안돼' 조그맣게 소리를 지르며 남자선배의 손길을 힘없이 막고 있었다. 둘 다 술이 많이 취했고 나도 취해서 어질어질한 상태였다.

 

그 광경에 충격까지 받은 난 그대로 방안으로 황급히 들어왔다.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한참 놀던 회장 선배가 나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너 왜  더 안 놀고 그러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힘없이 일어나 앉아서, 밖에서 이상한 걸 봤다고 말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아직 2학년밖에 안 되었던 남자애, 회장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하며 슬쩍 밖으로 나갔다. 

 

다음날 아침, 문제의 남녀 선배를 포함해 다들 아무일 없다는 듯 계속 다음 일정을 진행했다. 그 남녀 선배는 얼굴이 좀 굳어 있었던 것도 같다. 회장이 얘기를 했을까? 내가 봤다는 얘기도 전했을까? 왜 나는 아무 개입도 하지 않았을까? 그때는 20년도 더 전이지만, 요즘이었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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