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때는 여행을 참 많이 갔다. 이제 학부 때 여행 이야기는 대강 다 쓴 것 같으니 정리 한 번 해보자면, 한 학년을 보내는 동안에는 신입생 엠티, 총엠티, 학년 엠티, 학회 엠티, 답사, 봄여름가을 농활, 언더티 합숙, 동아리 여름 여행 등이 있었다. 1학년 때는 소속된 곳의 모든 여행을 따라 갔으며 2학년 때는 절반쯤, 3학년 때부터는 거의 안 간 것 같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그럴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나서 대학원에 들어가니, 거기도 신입생 환영 엠티 같은 게 있긴 했는데, 아무래도 매년 열리지는 않았다. 참여가 너무 저조했기 때문에 누군가 추진을 하다가도 흐지부지 무산되고는 했다. 거긴 정신없이 어울려 노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거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 정도 웬일로 엠티가 성사돼서 갔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학생의 부모님 별장이 아니라, 학생 '본인' 별장으로 갔다는 격세지감이 생겼다.
무슨 말이냐 하면, 박사과정에 있는 선배는 이미 나이가 40대였고 본인 소유의 집은 물론 교외 지역에 별장을 가지고 있어서, 동료 대학원생들의 엠티 장소로 제공했던 것이다. 그때 모처럼 개최된 엠티에 60넘은 노교수도 와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꽤 재미있게 술을 마셨던 것 같다. 사진도 많이 남아 있고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대학원생 몇 명이 의기투합해 전주영화제를 보러간 건 의외의 사건이었다. 거의 유일한 여행의 기억이다. ‘여행’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당시는 가히 영화제의 시절이었는데, 각 지방 도시에 각종 테마로 생겨나는 영화제가 문화계 젊은이들을 강력하게 모아들이고 있었다. 영화제에 모여든 청춘들이 서로를 훑어보는 눈빛이 드글드글 끓던 시절이었다.
스태프나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는 영화 애호가나 영화계 지망생들도 많았지만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고 친구들과 가끔 여행처럼 갔더랬다. 그중 대학원 친구들과 보러간 건 전주영화제였다. 여자 네 명이 의기투합했다. 하지만 영화제를 보러간다는 건, 말 그대로 ‘영화’를 보러간 거여서 별다른 이벤트는 있을 수 없었다. 친구 하나가 귀신을 목격했다고 난리를 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돈이 없던 우리는 전주에서도 가장 지저분한 골목의, 쓰러져 가는 건물의, 허름한 여관 방 하나를 넷이서 쓰기로 했다. 더블 베드에서 둘이 자고 나머지 둘은 바닥에서 이불을 달라고 해서 자면 됐으니까 말이다. 어차피 영화제 때문에 숙박 시설들이 만원이기도 했다.
사실 꼭 잠을 잘 필요가 없기도 했다. 우리 넷은 하루종일 영화를 보았으며, 그중 셋은 밤샘 영화까지 보기로 했다. 밤부터 시작해 새벽까지 공포영화 세 편을 연달아 상영하는 일정이었다. 한 친구는 남아서 잠을 잔다고 했다.
밤샘 공포 영화를 본 우리 셋은 동이 튼 후에 비척거리며 여관방으로 왔다. 씻고 나서 아침 10시 첫 상영 전까지 잠깐이라도 잘 생각이었다. 근데 여관방에 남아서 자고 있을 줄 알았던 친구가 놀랍게도 깨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온방에 불이란 불은 다 켜고, 아직 쌀쌀한 봄날씨에도 불구하고 창문과 방문을 다 열고 있었다. 우리는 “무슨 일이야? 왜 이러고 있어?” 하며 들어갔다.
친구는 자다가 일어나보니 어두운 방 침대끝에 후드티를 입고 나갔던 선배가 앉아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친구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혼자 들어온 거야?" 그러나 후드티 형상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제야 소름이 쫙 끼친 친구는 비명을 지르며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복도에서 한참 벌벌 떨다가 다시 들어가 불을 켜보니, 형상은 간곳 없었다.
그리고 진짜 후드티를 입고 나갔던 선배를 포함한 우리 셋이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친구는 온방의 문과 창문을 열어놓고 불을 켜고 침대 위에서 덜덜 떨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누가 이 방에서 죽기라도 한 거 아냐?” 하고 친구를 놀리며 으스스 몸을 떨었다. 딱 봐도 건물과 방의 음기가 심상치 않았다.
전주 여행 갔던 사람들에게서 종종 귀신 얘기를 듣는다. 심지어 우리와 거의 비슷한 사연이 이다혜 [지금이 아니면 어디라도]에 등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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