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때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어쩌다 보니 수업마다 리포트로 대체한다고 했다. 봄이었다. 게다가 2학년 올라와서 학교와 좀 거리를 둬야겠다 생각하던 참이었다. 교실을 떠나, 과방을 떠나, 동아리방도 피해서,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도 보고 싶었다.
절친하게 지내던 영신과 희모에게 전라북도로 놀러가자고 부추겼다. 우리랑 그렇게 친하진 않았지만 심심해 보이던 못난이도 끼워주었다. 엠티 같은 단체행사는 빼고, 난생처음 마음 맞는 또래 친구들과만 떠난 여행이었다.
넷이서 밤기차를 탔다. 밤 12시쯤 기차를 타고 푹 자고 나면 새벽에 도착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전주역에 도착하고 보니 새벽 세 시 반이었다. 우리는 어두운 전주 역사 안에서 황당해 하다가 각자 신문지 한 겹씩 구해서 덮고 대합실 의자에 누웠다.
동이 트기 시작하자 부스스 일어나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우리의 무전여행이 시작되었다. 왜 우리가 그때 그 여행을 ‘남도 무전여행’이라고 불렀는지 모르겠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돈을 안 쓴 것도 아니었다. 첫날 아침 기차역을 나와서도 콩나물국밥을 사먹었던 것 같고 다음날부터는 허름하나마 민박이라도 구해서 잤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버스도 잘 타지 않고 하염없이 걸었고 또 분명히 기억나는 식사 장면이 있다. 어느 날 아침 내가 근처 구멍가게로 들어가 초코파이 한 상자를 산 다음, 친구들에게 ‘아침식사’로 몇 개를 먹을 건지 물었다. 다들 한 개만 먹겠다고 했는데, 못난이가 떨리는 손으로 손가락을 두 개 내밀었다.
“나, 난 두 개 먹을게.”
“뭐? 두 개를 먹겠다고?”
“으, 응...”
“정말이야? 두 개지?”
“...”
나는 못난이를 째려보다가 마지못해 초코파이 두 개를 내밀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우리는 일주일 동안 마이산과 내소사를 거쳐 변산 국립공원을 한 바퀴 돌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절친한 친구였던 영신과 희모는 점점 서로 몸의 밀착도가 커지더니, 여행 끝에는 마침내 커플이 되었다. 나는 왠지 그 모습을 보며 점점 시무룩해져서 못난이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야! 쟤들 방해하지 말고 넌 나랑 붙어다녀야 해. 알았어?
그러면 못난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응... 알았어...”
중간에 낀다는 건 때로는 선택을 강요당하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영신과 희모의 여행중 연애로 갑자기 어중간한 존재가 된 나는 더 이상 그 둘과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눈치를 봐가며 되도록 자리를 피해주어야 했다. 아마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도 못난이를 택해 연애를 시작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게 순리이거나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말이다.
어쨌든 그 여행을 다녀와서 시간이 좀 흐른 뒤에도 영신과 희모는 여전히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다. 예전 같을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따로 또 같이 어울렸다. 그리고 그 둘이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쯤, 결국 선택의 순간은 오고 말았다. 하지만 그 선택에 관한 이야기는 좀 더 시간이 지난 뒤 다른 지면에서 풀어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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