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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여행 모험

세 번의 강화도 여행

역사 시간에 배우길, 서울에서 가까우면서도 고립된 섬이라서, 삼별초의 대몽 항쟁지가 된 곳. 백두산을 대신해 천신제를 지내던 신성한 마니산이라며 고등학교 때 답사 여행을 갔던 곳. 나 개인적으로는, 가끔 맛집 나들이를 하려다가 세 군데 다리 중 한 군데 한복판에서 교통 체증에 걸려 버리던 곳,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제주도 가는 비행기에 타서 오른쪽 창가 좌석에 앉으면, 김포 평야를 지나자마자 커다랗게 떠오르는 네모난 섬.

옛날에 친구들과 강화도에서 숙박업을 하는 친구의 부모 집에 놀러간 적이 있다. 여자 셋, 남자 셋이서 우르르 몰려 갔다. 친구 부모님이 강화도에서 여관을 하신다기에, 펜션이라도 하시나보다 생각했는데, 가보니 진짜 여관이었다. 섬의 가장 서쪽, 노을이 드리우는 갯벌 바로 앞에 2층짜리 직사각형 콘크리트 건물이 서 있었다. 사람들이 시골에서도 주택에 살지 않고 아파트에 사는 이유는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여관은 참 실용적으로 보이는 건물이었다.

딱히 구경할 것 없는 여관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보니, 산으로 이어지는 언덕배기가 파헤쳐져 있었다. 거기서 캐낸 칡뿌리는 즙을 내어 마시고, 결과적으로 생겨난 뒷마당은 여관 침구를 세탁하고 말리는 작업장으로 활용한다고 했다. 직접 포크레인을 조작하고 침구를 관리하는 친구 아버지는 생활의 활력으로 가득차 보였다. 우리는 며칠 동안 방 두 개를 차지하고서  소꿉장난처럼 아버지를 도왔다. 애인에게 대차게 차여 넋이 반쯤 나간 상태였던 친구도 며칠 의 맑은 공기와 노동 속에서 약간이나마 활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내게 강화도는 무엇보다 엄마의 고향이다. 내 외갓집이 시작된 곳이다. 선박 사고와 인천으로의 유학, 옛 신촌 강화 터미널 근처에 모여 사는 친척들 같은 에피소드를 들으며 자란 나에게,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서 있는 까만 여자 어린이의 모습은, 내 엄마의 유년 시절을 상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였다.

그런데 성인이 된 지도 꽤 시간이 지나 처음으로 찾아가본 엄마의 고향마을은 심심산골이었다. 그런 두메산골을 가본 적은 난생처음인 듯했다. 그 넙데데한 섬이 넓이가 얼마나 된다고, 강화대교를 건넌 후 좁디좁은 도로를 굽이굽이 자가용으로 두 시간쯤 들어가서야 당도한 마을이었다. 정말이지 21세기 우리나라에도 이런 오지마을이 있었나 싶은 곳은 울창한 녹음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마을 어느 시골집 안마당에서 외할머니의 마지막 생일잔치가 차려졌다. 그녀의 환갑잔치였고 나처럼 이곳이 처음인 손주들도 많았지만, 아들딸들도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을 거라는 예감 때문이기라도 한 듯 모두가 쾌활하려 애썼던 7월의 맑은 날이었다. 만찬이 끝나고서는 근처 갯벌로 우르르 몰려가 낚시와 해루질에 열중했다. 꼬맹이들은 그냥 진흙탕 속에서 뒹굴며 놀았다.



마지막으로 강화도에 갔던 건 중학교 때의 친구와 함께였다. 중년까지 이어져온 우정이지만 만나면 늘 한쪽의 집에서 김치나 담그며 수다를 떨던 사이였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교외의 멋진 카페 같은 곳에 가보자고 의기투합했고, 행선지를 강화도로 정했다. 우리는 각자 차를 몰고 중간 지점에서 만나, 한 차로 강화도까지 가기로 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새삼 자가용 운전자가 돼버린 서로의 처지를 신기해하며 상당히 들뜬 기분으로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유적지 공원도 돌아보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추운 봄 날씨에 덜덜 떨면서도 걷기를 그만두지 않다가, 그만 옛 관계를 되풀이하고 말았다. 사실 그녀와 나는 3년전에 크게 싸우고 서로 보지 않다가 오랜만에 만난 참이었다. 수십년의 세월은 조심성도 희석시키지만 안 좋은 습관을 굳어지게 만든다. 결국 그날도 우리는 꽤 큰소리까지 지르며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다가 원망을 주고받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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