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인 그냥 친구와 단 둘이 여행을 간 경우가 많지는 않은 편이다. 게다가 왠지 늘 여행을 가면 싸우거나 사이가 조금이라도 틀어졌던 것 같다. 그런데 그녀와 갔던 수안보 여행만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뿐이 아니다. 아예 ‘생애 최고로 행복’했던 여행이라는 말까지 나왔던 순간이 있었다. 그게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어서 문제지.
여행을 같이 가자는 말을 그녀가 꺼냈다. 온천을 좋아하는데, 같이 가달라고. 나는 당시 한창 열애중이던 때라 그녀의 요청이 좀 떨떠름했지만 거절할 순 없었다. 애매하게 긍정을 하고선 깜빡 잊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연락이 왔다. 내일 떠나자고. 아, 내일이었던가? 당황스러웠지만, 마침 딱히 일이 없던 나는 얼결에 그러마고 했다. 그러고서 다음날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그녀를 만났다.
거기까지 나를 데려다준 남친과 나는 거의 눈물의 이별 장면을 찍는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당시 솔로였던 그녀의 눈치를 슬쩍 봤는데, 역시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사실 그녀에게는 약간의 자폐적 성향이 있어서 남의 감정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다. 더구나 자기에게 향하는 감정이 아니라 타인 둘 사이에 오가는 감정은 아웃 오브 안중일 뿐이었다. 남친과 유난을 떤다고 기분 상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눈치를 본 내가 오히려 머쓱할 정도였다.
우리는 고속버스에 나란히 앉아서 수안보 온천장으로 향했다. 충남의 소도시이자 쇠락한 관광지인 수안보는 썰렁했다. 머나먼 과거엔 신혼 여행지로 날렸다던가. 이제는 동네 노인들이나 오는 목욕탕 수준의 여관에서 젊은 여자 둘이 뭘 한단 말인가. 나는 막막했고 그녀도 딱히 흥겨워 보인다기보다는 덤덤한 얼굴로 대목욕탕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워터파크 같은 게 아니라 홀딱 벗고 들어가는 여탕이라서, 난 좀 껄끄러웠다. 그녀와 내가 친구긴 하지만 알몸까지 공유할 사이인가는 의문이었다.
그래서 난 객실에 딸린 목욕탕에서 씻겠다고 했다. 그녀는 “응? 후회 안 하겠어?” 같은 말을 하고 혼자 쿨~하게 대목욕탕으로 갔다. 다녀와서 저녁을 먹고 나니 거의 한밤중이었다. 나와 그녀는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어슬렁 다니다 보니, 나름 유흥지인지, 낡은 놀이 시설이 모인 조그만 놀이 공원이 있었다. 작은 바이킹과 회전목마 같은 것들이었다. 우리는 먼저 바이킹을 타고 오르내리며 꺅꺅 소리를 지른 다음, 회전목마를 타고 빙글빙글 돌면서 어두컴컴한 동네 풍경을 내다보았다.
문제의 발언은 그때 나왔다. 막 바이킹에서 내린 터라 아직 꺅꺅거린 웃음이 남아 있던 그녀가 문득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인생에서 이렇게 행복한 때가 또 있을까?” 농담이 아니었다. 그녀의 반짝거리는 눈과 아련한 표정은 진심이었다.
말했다시피 나는 목하 열애중이었고 한창 남친과 즐거운 추억을 쌓는 중이었다. 설령 그렇지 않고 내가 그때까지 모태 솔로였다고 해도, 그 전까지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좋았던 순간이 분명 꽤 있었다. 주말에 남친과 함께 있지도 못하고, 이런 퇴락한 유원지에서, 그럭저럭 친하긴 하지만 단짝도 아닌 친구 한 명과 회전목마를 타는 시간은 대체로 음울했고, 지금은 밤도 늦고 주변이 너무 어두워 살짝 겁도 나는 상황이었다.
늘 평범하게만 보였던 그녀의 지난 인생이 갑자기 새삼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애는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던 걸까? 중산층 부모 밑에서 자라 무난히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에 취직한 거 아니었나? 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말하지? 나는 순간 아연했다가 점점 심각해졌다. 뭔가 인생의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몇십년 늙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온천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친구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늘 그렇듯 맥주와 안주를 잔뜩 사다가 숙소로 돌아가, 먹고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난 우리는 다시 어제의 대화를 반복했다. “너 정말 대목욕탕 안 갈 거야?” “응, 나는 방에서 씻을게.”
숙소를 나와서는 다시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시내로 향했다. 아침으로 해장국을 먹고 나서 잠시 자그마한 시내를 둘러보고 있자니 의외로 꽤 번듯한 극장이 눈에 띄었다. 커다란 간판에는 얼마 전에 멜로 영화로 흥행한 지 꽤 된 [편지]라는 작품이 그려져 있었다. 박신양과 최진실이 주연인 슬픈 사랑 이야기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그녀가 함께 보지 않겠냐고 청했다.
딱 봐도 지루해 보이는 영화가 정말 보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그러는 듯했다. 그런 눈치가 보이니, 어제의 사건도 마음에 걸리고 해서, 나는 차마 빨리 서울로 돌아가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두 시간이 안 되는 영화는, 처음에는 잠시 발랄한 연애와 행복한 신혼을 보여주는가 싶더니, 중반부터는 남편의 투병과 죽음, 이어진 사후 편지로 그야말로 눈물을 쏙 빼려 작정한 듯 신파의 정석을 이어갔다.
그녀는 말할 것도 없고 나 역시 평소 냉정하다는 말도 가끔 들을 만큼, 감상적인 성격이 아니었지만, 영화 후반부터 펑펑 눈물을 쏟으며 코를 어찌나 풀었던지 둘 다 서로 휴지를 찾느라 바쁘다가 영화관을 나왔다. 그리고 나와서 환한 대낮에 벌게진 눈으로 마주보며 함께 어이없어 했다. “우리 왜 울었던 거냐?” 역시 우리는 잘 맞는 친구기는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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