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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 친구와 수안보 여행 동성인 그냥 친구와 단 둘이 여행을 간 경우가 많지는 않은 편이다. 게다가 왠지 늘 여행을 가면 싸우거나 사이가 조금이라도 틀어졌던 것 같다. 그런데 그녀와 갔던 수안보 여행만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뿐이 아니다. 아예 ‘생애 최고로 행복’했던 여행이라는 말까지 나왔던 순간이 있었다. 그게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어서 문제지. 여행을 같이 가자는 말을 그녀가 꺼냈다. 온천을 좋아하는데, 같이 가달라고. 나는 당시 한창 열애중이던 때라 그녀의 요청이 좀 떨떠름했지만 거절할 순 없었다. 애매하게 긍정을 하고선 깜빡 잊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연락이 왔다. 내일 떠나자고. 아, 내일이었던가? 당황스러웠지만, 마침 딱히 일이 없던 나는 얼결에 그러마고 했다. 그러고서 다음날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그녀를..
세 번의 강화도 여행 역사 시간에 배우길, 서울에서 가까우면서도 고립된 섬이라서, 삼별초의 대몽 항쟁지가 된 곳. 백두산을 대신해 천신제를 지내던 신성한 마니산이라며 고등학교 때 답사 여행을 갔던 곳. 나 개인적으로는, 가끔 맛집 나들이를 하려다가 세 군데 다리 중 한 군데 한복판에서 교통 체증에 걸려 버리던 곳,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제주도 가는 비행기에 타서 오른쪽 창가 좌석에 앉으면, 김포 평야를 지나자마자 커다랗게 떠오르는 네모난 섬. 옛날에 친구들과 강화도에서 숙박업을 하는 친구의 부모 집에 놀러간 적이 있다. 여자 셋, 남자 셋이서 우르르 몰려 갔다. 친구 부모님이 강화도에서 여관을 하신다기에, 펜션이라도 하시나보다 생각했는데, 가보니 진짜 여관이었다. 섬의 가장 서쪽, 노을이 드리우는 갯벌 바로 앞에 2층짜리 직사..
광주 비엔날레와 수영장 사고 미술 공부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던 시절이 있었다. 가끔 모임에 끼어서 얘기해보면 처음 사람을 만날 때 나이가 몇이냐(무슨 띠냐!) 고향이 어디냐(본관이 어디냐!) 물어보고 인맥 찾기 하는 것이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속된(?) 모습에 실망을 했더랬다. 덕분에 미술계에 대한 환상을 버리게 된 건 다행이랄까. 그런 모습을 꽤 오래 지켜보지 않았더라면 난 여전히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미술계를 기웃거리거나 미술 공부를 자꾸 시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번 글에서 쓴 것처럼, 미술 공부 하는 사람들과 여행도 꽤 갔었다. 앞으로 두 번 정도 더 쓸 것 같은데, 이번엔 광주 비엔날레 갔던 얘기를 쓸 차례다. 1회, 그러니까 처음 열린 광주 비엔날레에 갔다. 우리..
부산 결혼식과 미술인들 다른 학교 학생들과 오래 스터디를 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하는 스터디에 나 혼자 껴들어간 거였다. 1년 넘게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났고 만난 날은 스터디뿐 아니라 술도 함께 마셨으니까 꽤 친해졌다. 사실 내가 들어가고 싶던 학교였다. 하지만 학자금이 모자랐다. 그래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다른 학교에 입학을 해야 했다. 그 대신 원래 가고 싶던 그 학교의 학생들에게 연락해서 스터디 꼽사리를 끼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거기 학생들은 나를 아무 텃세도 없이 받아주었다.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스터디가 끝나고 나서도 그때 애들은 나를 술자리 등에 자주 불러주었다. 그중 두셋과는 아주 친해져서, 그들과 자주 어울리다보면 다른 아이들과도 종종 마주쳐서 계속 안면을 이어가게 됐다. 그렇게 관계들이 이어졌다..
전주 영화제의 유령 학부 때는 여행을 참 많이 갔다. 이제 학부 때 여행 이야기는 대강 다 쓴 것 같으니 정리 한 번 해보자면, 한 학년을 보내는 동안에는 신입생 엠티, 총엠티, 학년 엠티, 학회 엠티, 답사, 봄여름가을 농활, 언더티 합숙, 동아리 여름 여행 등이 있었다. 1학년 때는 소속된 곳의 모든 여행을 따라 갔으며 2학년 때는 절반쯤, 3학년 때부터는 거의 안 간 것 같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그럴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나서 대학원에 들어가니, 거기도 신입생 환영 엠티 같은 게 있긴 했는데, 아무래도 매년 열리지는 않았다. 참여가 너무 저조했기 때문에 누군가 추진을 하다가도 흐지부지 무산되고는 했다. 거긴 정신없이 어울려 노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거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 정도 웬일로 엠티가 성사돼서 갔던 적이 ..
충주의 합숙 여행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조직을 계획할 때, 어떤 기준에 의해서 사람을 분류하고 나누는지 목격하는 일은 당황스럽다. 남이 분류되는 광경을 바라보는 일은 민망하고, 내가 분류되는 체험은 몹시 당황스러울 것이다. (인간에겐 '자아상'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게 침해되면 큰 심적 충격을 받는단다) 대학교 2학년 때, 나를 분류한 선배들이 있었다. 내 짐작으로는 ‘열등반’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내가 1학년 때부터 운동권 사상을 공부하지 않아서 그럴 거였다. 다들 1학년 때부터 학습 모임을 해왔는데, 나는 뒤늦게서야 공부를 하고 싶다고 '컨택'을 했다 미국에서 잠깐 살다가 정원외로 들어왔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고백하듯 되풀이 실토하던 선배가 나를 받아주었다. 그러니까 그 선배도 약간의 열등반이었다. 고등학교 때부..
다섯 살 어린, 술취한 사람들과의 여행 다섯 살이라니.. 지금 기준으로 봐도 나이 차가 많이 나긴 했구나. 물론 열살을 넘어 스무살 이상 어린 사람들과도 어울리게 된 지금 기준으로 보면 뭐... 하지만 그때는 이십대 시절이었으니, 한 살 차이도 크게 느껴지던 때였는데, 무려 다섯 살 어린 사람들과 여행을 갈 생각을 하다니, 나, 무슨 생각이었나 싶다. 단체 활동이 활발했던 대학 때였다. 아아..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는 정말 모든 게 단체로 움직였구나.. 이것도 새삼스럽다. 혼자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는 일이 아예 없던 시절이었다. 하여간 24시간 중 18시간 정도가 단체 생활로 맞물려 돌아가던 그런 놀라운 시절이었구나. 하여간 그러다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조금씩 혼자만의 시간이 늘어가고 이념의 조류, 아니 시대의 흐름 자체도 개..
선배된 자의 캡모자와 후배의 꼭잡은 손 누군가에게 선배가 돼본 경험은 처음이었다. 물론 난 장녀고 연년생 여동생이 하나 있으니까 ‘언니’ 노릇은 거의 태어날 때부터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엄마가 전하는 말에 따르면 두 살 때 나는 잠들어 있는 동생 옆에 앉아서 “아기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귀여워 했단다. 비슷한 사진도 있으니 정말인가 보다. 물론 그러다가 아기 손가락을 꼭 깨물어서 와앙 울려놓은 적도 있다지만. 또 학교에 처음 갔던 국민학교 1학년 때 하굣길, 동네밖까지 나와서 나를 기다리던 동생에게 내가 메고 있던 책가방을 내주며 “아유, 힘들다.” 짐짓 생색을 냈고 동생은 감사하게 책가방을 받아메던 기억도 있다. 이후로는 싸운 기억밖에 없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난 언젠가부터 손윗사람 노릇이 어색했다. 일단 누군가를 귀여워해 본 적이 거..
고성 바닷가의 사춘기, 여름 휴가 로맨스 내게도 사춘기의 여름 휴가 로맨스가 있었다. 소설이나 영화 속 화려한 이야기들에 비하면 딱할 만큼 보잘 것 없는 사건이었지만, 그때 바닷가 하늘과 모래의 색채라든지, 귓속에서 뭔가 윙윙거리는 듯하던 현기증, 팔뚝에 오소소 돋았던 소름을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지금까지 숱한 ‘사춘기 여름 휴가 로맨스’가 소설로, 영화로 나온 것 같은데, 요즘은 어쩐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하나만 항간에 화제가 되고 있고 다른 작품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듯하다. 영국의 대학 교수 가족이 이탈리아 시골의 아름다운 농가 저택으로 여름 휴가를 가서, 조교인 멋진 청년의 방문을 받는다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설정이라서 그런 걸까. 반면 한국의 사춘기란 학원 로맨스물만 창궐하는 신세다.. 내가 어릴 때, 아버..
니콘 F3를 빌려서, 혼자 갔던 여수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혼자 여행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대학 방학 때 지방 친구들을 찾아 혼자 서울을 떠난 적이 있었지만, 당연히 도착해서는 그 지역 친구네 집에서 잤고, 낮에도 함께 돌아다녔다. 20대 중반, 동생이랑 한 달 동안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가, 2주 만에 싸우고 헤어졌지만, 끊임없이 길거리에서 동행을 구해 같이 다녔다. 30대 중반, 출장으로 갔던 여행은 혼자일 때도 있었지만 예외로 해야 될 것 같고… 요즘엔 가끔 제주도에 혼자 가게 됐지만, 그건 서귀포에서 펜션을 하는 친구가 있기 때문이라서, 친구가 바쁠 때만 좀 혼자 돌아다닐뿐, 그래도 함께 다닐 때가 많다. 아무래도 내가 혼자 갔던 여행은 까마득한 옛날, 이십대 초반, 여수와 통영 일대를 돌아다녔던 여행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구비 문학 채록 여행과 폭력 2 (앞글에 이어서) 까마득한 대학원 선배도 지엄하게 함께한 자리, 모든 사람이 기겁을 했다. 신입생 여자애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느닷없이 회장에게 발차기를 날렸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당사자인 나조차도 이해가 안 되는 초현실적 상황이었다. “야, 너 왜 그래?” 하는 고함들과 함께 잠시 모두가 얼어 있다가, 내가 “어흑,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것으로 상황은 대강 마무리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까지도, 분위기가 좋지 않았지만, 나에게 더 이상의 해명이 요구되지는 않았다. 그냥 술취해서 그랬겠지 생각들 하는 듯했다. 그리고 우리는 침묵 속에 서울로 돌아왔다. 고전학회 회장은 성실하고 착한 남자였다. 늘 궂은 일을 도맡으며 사람도 잘 챙기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나에게도 살갑게 대해주어..
구비 문학 채록 여행과 폭력 1 대학 신입생 때, 고전문학학회에 들어갔을 때는 그런 여행도 있는 줄 몰랐다. 이왕 국문과 대학에 들어왔으니, 현대문학만 공부하지 말고 고전문학도 좀 공부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들어간 학회였다. 외국어에서 느끼게 되는 호기심과 비슷했다. 아무리 우리의 것이라지만, 낯섦에 대한 매력으로 고려가요니, 향가니 하는 것들과 한문학에 접근했던 거다. 어차피 정식 수업은 아니었다. 난생처럼 나의 또래들끼리 세미나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 모여서는, 같이 문헌을 찾아보고 멋대로 해석도 해보고 이론적인 난상 토론을 벌이는 게 재미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 시시하고 따분한 고문헌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또래들과의 모임도 시들해졌을 무렵, 겨울 방학 때 ‘구비문학 채록 여행’을 간다고 했다. 고전문학 중에서도 구비전승을..
그림 동아리의 여름여행과 겨울여행 대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제주도에 가보았다. 지금은 일년에 몇 번씩 가게 된 제주도. 너무 많은 추억이 쌓여가서, 최초의 기억 같은 건 이제 너무 멀리 떠나보낸 것 같지만… 대학에 입학 하자마자 가입했던 그림 동아리에서 열흘간 제주도로 여름 스케치 여행을 간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저마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거기에 작은 스케치북 정도를 챙겨 갔던 것 같다. 아무래도 실제 그림을 그린 기억이나 사진은 없는 것 같은데... 스무명도 넘는 인원이 목포까지 밤새 완행 열차를 타고 내려가서 제주행 페리를 타는 여정이었다. 야간 기차안에서 술 먹고 포커치고 노래를 부르던 대학생들의 밤샘 아수라장 중에 유일하게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풍경은, 당시 부회장 역할이었던 어느 활달한 여자선배의 행동이었다. 아침이 되자 ..
농활과 마의 산 옛날에 대학에 들어갔더니 2월부터 4월까지 여섯 번인가 여행, 아니 엠티를 가게 됐다. 단과대학에서 다 함께 가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개별 학과에서 가는 전체 꽈엠티, 우리 과 신입생끼리 가는 학년엠티, 그리고 새로 들어간 학회에서 가는 학회엠티, 스터디 모임에서 가는 스터디엠티, 동아리에서 가는 동아리엠티. 매주 계속되는 외박에 엄마는 혀를 내두르며 더 이상 엠티는 못 간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4월말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행이 있었다. 그건 바로 봄농활, 즉 ‘대학생 농촌 봉사 활동’이었다. 분명 엠티는 아니었다. 나는 빡빡 우겨서 봄농활을 기어이 갔다. 보통 농활은 여름에 간다. 열흘 동안 뙤약볕에서 새까맣게 그을리며 논에서 잡초(피)도 뽑고 채소 수확도 하는, 대학 생활을 통틀어 가..
동기들과의 엠티 옛날 옛적 대학교 신입생이 되었을 때, 거의 매주 이런 저런 오리엔테이션과 엠티를 가다가, 학기가 시작하고 두어 달 후, 동기들끼리만 엠티를 가게 됐다. 학교 생활을 선배들의 지도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던 학기초,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과, 한 켠에서 자라나던 그들에 대한 거부감, 반항심 때문에 꽤 스트레스를 받았나 보다. 드디어 우리 스무살 동기들끼리만 모여서 엠티를 갔더니, 나는 그날 저녁 술을 엄청 퍼마시고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처음으로 필름이 끊어졌지만 지금도 언뜻언뜻, 그때의 내가 바닥에 엎어져 대성통곡을 하고, 한 여자애가 내 머리를 쓸어올려주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슬픈 말투로 말했다. "왜 삼단 같은 머리를 풀어내리고 우니..." 그때 내가 머리가 좀 길었다. 그 난장판 와중에 ..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바람이 심하게 불던 바깥은 해가 지고 캄캄해졌다. 밖에서 공식 행사를 끝낸 사람들은 휑하니 추운 건물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그리고 각자 배정 받은 방으로 흩어져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문을 열어둔 방들에서 웃음소리와 박수소리, 취한 고함소리가 왁자하게 퍼져 나왔다. 나는 배정된 방의 호수를 잊어버렸다. 어디로 가야 그나마 좀 낯익은 얼굴들이 보일까,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렸지만, 건물 한 층을 다 돌도록 내 방을 찾지 못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아이들은 그 짧은 시간에 벌써 미쳐 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가 질리며 슬슬 겁이 났다. 다른 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서둘러 내려갔다. 늦은 겨울, 혹은 이른 봄,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대학교 캠퍼스에 모여 수십 대의 관광버스에 탔더랬다. 거대 도시..
가난한 친척과 함께 휴가를 내가 어릴 때 아버지 회사에서는 여름마다 지방 관광지에 숙소를 정해 직원의 가족들이 차례로 가서 2박3일씩 머물다 오도록 했다. 주로 동해의, 크지만 낡은 중급 호텔이었다. 어린 나와 동생은 엄마에게 “올해 여름엔 어디 가?” 하고 물어보고 엄마가 “설악산”이라고 하면 “또!” 하면서 불만스러워했던 것 같다. 설악산 아래 호텔에 머물면서 아침마다 단체 버스를 타고 근처 동해바다로 해수욕을 하러 가는 휴가는 좀 지루했다. 그러다가 어느 해던가는 휴가지가 ‘경주’로 지정되었다고 해서 꽤 기대에 부풀었다. 그리고 엄마는 나의 사촌들도 같이 데려가겠다고 했다. 아버지에겐 아버지보다 조금 가난하게 사는 형이 있었고, 나의 엄마는 그집 큰엄마와 친하게 지냈다. 그집에는 나보다 두 살 많은 사촌언니와 한 살 아래 사..
청소년 수련회 혹은 여름 캠프 미국 영화를 보다 보면 summer camp 이야기가 가끔 나온다. 특히 10대를 주인공으로 한 청소년 영화의 경우 한 달까지도 이어지는 여름 캠프는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다. 여름 방학 동안 부모와 학교의 보호를 떠나 (자격이 좀 의심스런) 낯선 어른의 휘하에 들어가서 낯선 아이들과 함께 장기간을 숲속 같은 자연에서 보내는 험난한 시간이다. 아마 그 시간 동안 부모는 아이 없는 휴가를 즐기겠지..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관습은 있어 왔다. 미국처럼 상업화, 제도화되지는 않았지만, 주로 종교 단체들에서 단기간의 청소년 수련회를 개최하고 학교에서도 수학여행 이외에 몇 가지 명목의 수련회를 마련할 때가 있다. 나도 어린 시절 사진첩을 들춰보면, 수많은 소풍과 수학여행과 수련회의 사진들이 가득하다. 낮에 관광지나 ..
동해의 낚시와 지렁이 마법 ​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내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동해의 소도시로 전근을 갔다. 이전에도 부모와 함께 동해의 바닷가를 놀러갔던 적이 있지만, ‘지방 도시’에는 이때 처음 가봤던 것 같다. 바다 냄새가 실린 깨끗한 바람과 시내 중심가의 나지막한 건물들, 그리고 독특한 억양으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도시. 여행과 자연을 좋아했던 나의 부모는 지방으로 전근 가서 행복해했고, 1년 동안 마치 파리로 전근 가서 남프랑스로 여행이라도 다니는 사람들처럼, 강릉 일대를 신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나랑 동생은 처음 낚시를 해보았다. 아버지의 직장 동료가 데려간 어느 호숫가에서 생각보다 많은 장치들로 이루어진 낚싯대를 손에 잡고, 위험하게 생긴 바늘과, 신기한 원리의 찌에 대해서 배웠다. 문제는 미끼였다. ..
위엄 있는 안동의 소녀들과 폐교의 화가들 ​ 대학 2학년 겨울방학 때, 나 혼자 찾아다닌 지방의 친구들 가운데는 안동 사람도 있었다. 그녀와 나는 자주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가끔씩 따로 만나 지난 이야기를 왕창 털어놓는 사이였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고향인 안동 이야기를 많이도 들었다. 하회마을로 대표되는 안동은 유서 깊은 가문들이 모여사는 전통의 고장으로 알고 있었지만, 친구와의 수다를 통해 든 인상은, 가장 향우회의 활동이 활발한 고장이 아닌가 싶었다. 그녀는 안동 향우회에서 대부분의 친구 관계를 맺고 연애도 그 안에서 했다. 그해 겨울방학, 안동에 무작정 찾아갔더니 그녀는 말로만 듣던 자기 친구들을 술집에 불러모아 소개를 시켜주었다. 좁은 안동 시내에서 몇 차를 하며 돌아다녔더니, 결국 하룻밤만에 그녀의 고향 친구는 모두 한 번씩 만나거나 ..
사촌의 시골 외갓집 ​ 내가 어렸을 때는 방학이면 ‘시골 외갓집’에 내려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뭐, 상황이야 다 달랐겠지만, 대체로 여름 내내 산과 들에서 신나게 뛰어 놀고 오두막에서 할머니의 귀염을 듬뿍 받으며 맛있는 과일을 먹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동화 같은 이미지가 전형적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시골에 사는 친척이 없었다. 친할아버지와는 같이 살았고 외할머니의 집도 서울에 있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몇번 졸랐다. “우리는 왜 시골에 친척이 없어? 나도 시골 가고 싶어.” 그러자 엄마는 우리와 가깝게 지냈던 큰엄마의 친정인 어느 시골로 우리를 보냈다. 큰엄마도 역시 여름 방학이면 나의 사촌 자매들을 외갓집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곳이 김포였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지금은 공항이 있고 신도시가 생겨난 김포가 그냥 논밭뿐이던 시..
팔도의 친구 찾기, 포항 2 ​ 꼭두새벽부터 시작된 하루는 꽤 길었다. 포항 친구네 집에서 아침을 먹은 다음, 친구와 나는 포항 시내 구경을 나섰다. 지방 도시 구경이 뭐 있었겠냐만, 산책처럼 여기저기 슬렁슬렁 걸어다니기로 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매일 저녁 술을 마시고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갔다가 오전 수업을 제끼고 오후가 돼야 기어나오는 생활을 반복하던 두 여자애가 동이 튼 지 얼마 안 된 아침에 집을 나서니 어색한 웃음도 나왔다. 나도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포항의 부모님 댁에서 나와서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친구는 더욱 그랬다. 학교에서 그녀는 술고래 신입생으로 통했으며, 그녀의 아버지가 목사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대학생이었기에 그랬는지, 포항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이곳의 대학교에 가보..
팔도의 친구 찾기, 포항 1 ​ 대학교에 들어가니,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온 친구들이 절반 이상 됐다. 전국에서 모인 지방색이 제각각 다채로운 개성을 뿜어냈다, 면 아주 흥미로웠겠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한 민족이었던 데다가 한 대학에, 한 학과에 모인, 같은 나이의 젊은이들이었기에 억양과 말투를 빼면 서울 출신 젊은이들과 지방 출신 젊은이들은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고 양가 조부모도 모두 서울에 있었던 나는 지방에서 온, 재미있는 말투를 쓰는 친구들이 신기했다. 특유의 억양을 흥미롭게 듣고 고등학교 때는 어땠는지 물어보고… 차마 부모님은 뭐하시는지까지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방학 되면 그들의 시골(?)집에 놀러가야지 마음먹었다. 하지만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겨울 방학에야 좀 한가..
계곡물에서 수영을 비웃던 사람들 ​ 어릴 때 여름이면 우리 가족은 주로 산골 계곡으로 물놀이를 갔다. 바다보다는 민물이 아이들 튜브 타고 놀게 하기는 편하니까. 게다가 그 당시엔 국립공원 계곡에서도 버너(브루스타)를 가져가서 희고 평평한 너른 바위 위에 차려놓고 밥을 해먹는 게 흔한 풍경이었다. 우리가 가던 곳은 대부분 유흥지로 개발된 서울 근교 야산의 얕은 계곡이었지만 설악산처럼 깊고 험준한 계곡도 꼬마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누비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비룡폭포’ 같은 이름들이 떠오른다. 그 정도 되는 높이의 폭포 아래는 ‘용소’라고 해서 상당히 깊고 물살이 거친 웅덩이가 형성되기 마련이었다. 어느 여름인가는 그렇게 큰 폭포 아래 검푸른 용소를 지나다가, 조금 전 빠져죽었다는 남자의 시신을 보기도 했다. 아직 경찰이나 구급대원은 도착하..
시골길의 따귀 ​​ 내가 어린 시절엔 지금처럼 자가용이나 여행이 흔하지 않았지만, 우리 가족은 주말이면 자주 소풍 비슷한 서울 근교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 당시는 관광지가 발달한 시절도 아니었으니까, 주로 산(관악산)이나 바닷가(강화도), 계곡(북한강) 같은 곳이 나들이 장소가 되었다. 친척이나 친구들과 같이 가기도 했고 우리 가족 넷만 단출하게 움직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가족만 소풍을 떠날 때, 아빠는 종종 모험적인 선택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털털거리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 내려보면, 전혀 나들이 장소로 적당하지 않아 보이는 곳, 그러니까 허허벌판, 아니 황량한 논밭 한가운데일 때가 많았다. 그럴 때 찍은 사진들이 몇 장 남아 있는데, 그래도 초창기 사진들에선, 풀이 우거진 논둑 사이 좀 널찍한 곳에 돗..
중간고사와 더블데이트 여행 대학교 때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어쩌다 보니 수업마다 리포트로 대체한다고 했다. 봄이었다. 게다가 2학년 올라와서 학교와 좀 거리를 둬야겠다 생각하던 참이었다. 교실을 떠나, 과방을 떠나, 동아리방도 피해서,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도 보고 싶었다. 절친하게 지내던 영신과 희모에게 전라북도로 놀러가자고 부추겼다. 우리랑 그렇게 친하진 않았지만 심심해 보이던 못난이도 끼워주었다. 엠티 같은 단체행사는 빼고, 난생처음 마음 맞는 또래 친구들과만 떠난 여행이었다. 넷이서 밤기차를 탔다. 밤 12시쯤 기차를 타고 푹 자고 나면 새벽에 도착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전주역에 도착하고 보니 새벽 세 시 반이었다. 우리는 어두운 전주 역사 안에서 황당해 하다가 각자 신문지 한 겹씩 구해서 덮고 대합실 의자에..
엠티 나와서 춘천행 기차 타기 처음 춘천에 간 건 대학에 들어가서 한창 엠티를 다니던 1학년 봄이었다. 밤을 새며 술을 마시다가 동이 트기 시작했을 때, 혜진이가 고등학교 때 친구를 만나러 춘천에 간다고 주섬주섬 일어났다. 나는 꽤 헤롱거리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벌떡 따라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도 가겠다고 졸랐다. 술자리는 파장이 된 것 같은데, 이제야 잠자러 가기도 싫고 그렇다고 집에 가기도 싫은, 애매한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새학년이 시작되면 대학에서 이런 저런 엠티를 많이도 갔다. 신입생 엠티, 전체 엠티, 학번 엠티, 학회 엠티, 동아리 엠티... 엄마한테 이번 주 금요일에 엠티를 간다고 말하면 “무슨 엠티를 매주 가?” 하는 고함이 돌아오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학번 엠티라서 처음으로 동기들..
순교자들과 춤을 지금 사는 집 근처에 성당이 있다. 가끔 사람들이 모여 떠드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리고 특히 일요일 오전이면 미사가 끝나고 성당 마당으로 몰려나온 사람들이 한 주의 회포를 왁자지껄하게 푼다.어느 날씨 좋던 날 일요일 오전, 성당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용하니 좋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했지만, 또 괜히 걱정도 됐다. 무슨 일이 있나? 오후에 집을 나와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세상에, 일요일 오후의 성당이 텅 비어 있었다. 이렇게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모습은 처음 보는 듯했다. 아마 단체 여행을 떠난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비워 놓아도 되는 걸까?나중에 그 성당에 다니는 동네 분을 만나 물어보았다. 일요일 새벽부터 모두 함께 기차를 타고 성지순례를 떠났다고 했다. “어쩜, 한 분..
아빠와 딸의 등산 나의 꼬마 때 사진을 보면 아빠와 등산을 같이 가서 찍은 사진이 몇 장 있다. 엄마는 왠지 안 보이고 제법 걸을 수는 있는 나이가 된 내가 아빠 품에 안겨 있거나 등에 업혀 있다. 옆에는 아빠의 친구, 혹은 회사 동료인 듯한 사람들이 같이 사진을 찍었다. 아빠가 다니던 회사에서 단체 등산을 갔었나 보다. 어렴풋하지만 또렷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둘 있다. 하나는 아빠의 동료였던 어떤 언니가 유난히 나를 예뻐하다가, 끝내 나는 아빠 곁을 떠나 등산 내내 그 언니와 손을 잡고 산길을 걸었다. 일행 중에 아이는 나뿐이었던 모양으로, 모든 어른들이 나를 주목하며 잘 걷는다고 나를 격려해서, 어린 나는 힘든 티도 못 내고 끝내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또 한 번은 같이 등산하던 어떤 아저씨가 희한한 냄새가 나는 까만 ..
전곡의 개고기 내가 어릴 때 많이 따르던 아빠의 친구분이 계셨다. 우리집에 놀러올 때면 나랑 동생에게 신기한 과자도 갖다주고 재밌는 장난감을 사다주던 다정한 분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저씨라고 외치기도 했던 그분이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를 갔다. 지금 생각하면 서울과 가까운 곳임에도 휴전선 부근의 마을이라 엄청난 오지인, 경기도 전곡이라는 곳이었다. 우리 가족은 산 넘고 물 건너 전곡의 아저씨 집으로 여행을 갔다. 꽤 크지만 의외로 허름한 시골집에서 아저씨는 우리 가족을 너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어린 나로서도 그랬지만, 아마 우리 부모님으로서도 난생 처음 먹어볼 음식을 부산스레 대접해 주셨다. 그것은 마당 한가운데 커다란 솥에서 통째로 끓고 있는 개였다. 난 우리집 바둑이를 무척 좋아했는데. 개를 먹는다는 ..